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엑토르 베를리오즈 (문단 편집) === 해리엇 스미드슨과의 결혼 === 원래 로마유학은 3년 예정이었지만 로마 생활에 싫증난데다 빌라 메디치의 음악공부가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판단한 베를리오즈는 2년만인 1832년 11월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직후에 환상교향곡 연주회를 개최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베를리오즈는 로마로 떠나기 직전인 1830년 12월 파리에서 환상교향곡을 초연해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2년 후에는 더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나름 유명 작곡가 반열에 올라섰다. 베를리오즈에게 이 연주회가 특기할만한 것은 연주회의 성공 자체보다도 자신이 꿈에도 그렸던 해리엇 스미드슨이 이 연주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직접 해리엇을 연주회에 초대하지 않았으나 베를리오즈의 지인들이 그녀를 부추겨서 연주회에 데려온 것. 1832년 당시 해리엇은 특급 히로인으로 각광받았던 5년 전과 달리 계속 공연이 실패한데다 불어난 체중 탓에 더 이상 여주인공 역할을 맡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잃고 상심하고 있던 해리엇은 이 놀랍고 기괴한 교향곡이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베를리오즈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베를리오즈 역시 해리엇과 재회하자 소시적의 연정이 되살아났다. 베를리오즈가 평생 똑똑히 기억했던 날짜인 1832년 12월 9일을 기점으로 둘은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베를리오즈는 떠오르는 젊은 작곡가가 되었고 해리엇 스미드슨은 내리막길에 있었지만 베를리오즈에게 그런 세속적인 사항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1833년 10월에 결국 결혼을 강행한다.[* 10살의 나이 차이도 차이인데다 언어의 장벽까지 있었기 때문에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해리엇은 프랑스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베를리오즈도 영어가 서툴렀다. ~~그런데 어떻게 사귄거야~~] 그리고 이듬해 8월 두 사람은 유일한 아들 루이 베를리오즈(Louis-Clément-Thomas Berlioz)를 낳는다. 이렇게 어렵게 결혼을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 초기 빚에 쪼들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갖고 있던 환상은 금세 깨어져 버렸다. 그나마 처음 몇년간은 큰 풍파 없이 지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가 쇠락하면서 퇴물 배우가 되어 버린 해리엇은 잘나가는 남편에 대해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것은 해리엇의 나이와 비대해진 몸집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의 언어 능력이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살게 된 후에도 그녀는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으며 평생 프랑스어에 서툴렀다.] 둘 모두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자주 싸움이 벌어졌고 해리엇의 의부증에 가까운 집착에 질려버린 베를리오즈는 점차 그녀를 멀리하게 된다. 베를리오즈가 스페인 출신의 여가수 마리 레치오(Marie Recio)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베를리오즈와 해리엇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게 되고, 결국 1843년 두 사람은 이혼하고 아들 루이는 베를리오즈가 키우게 된다. 이후 해리엇은 알콜중독에 시달렸고 파리 근교에 살다가 1854년 쓸쓸하게 죽었는데, 비록 이혼을 했지만 베를리오즈는 해리엇에게 평생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으며 종종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다. 1848년 그녀가 심장병으로 쓰러진 후에는 치료비와 간호비도 모두 부담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혼도 하지 않았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인간적인 도리는 다 했던 것. 결혼 초기 베를리오즈는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로마 대상 수상자가 돼서 1830년부터 1835년까지 5년간 장학금을 받았는데 액수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작곡보다는 각종 잡지에 비평문을 기고하고 원고료를 받아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는 이 일을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쓴 글들이 나름의 지지를 얻으면서 음악비평가/이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베를리오즈는 경제사정이 나아진 후에도 평생 음악관련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베를리오즈가 저술한 "관현악법"은 해당분야의 고전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관현악을 공부하는 음악가 지망생들이 반드시 참고하는 책이다. 그가 쓴 회고록 역시 19세기 유럽음악을 연구할 때 반드시 참고하는 중요한 책이다.] 또한 당장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작곡가로서도 승승장구했다. 관현악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쇼팽]]과 [[프란츠 리스트|리스트]]와 같은 뛰어난 음악가들과 우정을 쌓았으며 이들은 베를리오즈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결혼 초기에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쇼팽과 리스트는 헤리엇의 공연에 찬조 출연해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공연 수익 전액을 신혼부부의 생활비 및 빚 변제에 쓰라고 주기도 했다. 한편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해서 악보를 출판하고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베를리오즈 당시에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자주 개최하기 쉽지 않았다(심지어 현재에도 오페라 공연이나 관현악 연주회보다 독주 연주회가 훨씬 자주 개최된다는 것을 상기하자). 더구나 베를리오즈의 작품처럼 큰 편성을 갖는 관현악곡은 정말 많은 연주자와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더욱 개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베를리오즈 입장에서 리스트가 자신의 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자주 연주회를 개최해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1834년에는 환상교향곡에 감명받은 [[파가니니]]가 베를리오즈를 찾아왔다. 당시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던 파가니니는 자신이 최근에 구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비올라를 연주해보고 싶다면서 비올라를 활용하는 곡을 작곡해달라고 의뢰했다. 파가니니의 의뢰로 탄생한 이 곡이 바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인 "이탈리아의 해롤드"이다. 하지만 이 교향곡을 살펴본 파가니니는 실망을 표시하며 자신의 의도와 맞지 않는 곡이라며 연주를 거절했는데, 이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파가니니가 원하는 것처럼 비올라의 비중이 높은 작품도 아니고 비올라 독주부도 현란한 초절기교와는 거리가 먼 철저하게 교항악적인 곡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은 1834년 11월 다른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다.[* 베를리오즈가 쓴 음악평론을 보면 화려함에 치중하는 오페라 아리아나 독주악기의 기교주의를 자주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파가니니와의 일화는 비록 쪼들릴지언정 음악에 대한 신념은 꺾지 않겠다는 베를리오즈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가 이처럼 반비르투오조 경향을 보인 것은 본인이 뛰어난 악기 연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 정작 의뢰인이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성공을 거두었다. 파가니니 역시 1838년 연주회에서 베를리오즈가 지휘한 이태리의 해롤드 연주를 감상한 후 자신의 안목이 좁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 작품을 크게 칭찬했다. 며칠 뒤 파가니니는 2만 프랑이라는 거액의 수표를 베를리오즈에게 전달했으며 이로써 작곡가 부부는 경제적 궁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오페라 분야에 도전하게 된다.[* 베를리오즈 당시 프랑스는 모든 음악 중에서도 오페라를 으뜸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성공한 오페라 작곡가들은 상당한 부와 명성을 누렸기 때문에 오페라는 프랑스의 모든 작곡가들이 가장 선망하는 장르이기도 했다. [[바그너]]역시 음악인생 초반에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을 노린 바가 있다.] 그는 1836년부터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풍운아였던 "벤베누토 첼리니"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1838년 작곡을 완료한 후 파리에서 초연했다. 하지만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으며 겨우 4번 상연된 후에 극장에서 내려갔다. 이 벤베누토 첼리니는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일관성 없이 혼란스러운데다 어떤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다가 어떤 장면은 처절한 비극성이 두드러지는 등 스타일도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오페라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이 벤베누토 첼리니의 대본은 코믹 오페라 스타일로 작성되었는데 당시 극장의 요청에 따라 다소 억지로 정가극(세미세리아) 스타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에도 이 오페라는 연출상의 난점 때문에 잘 상연되지 않는다. 다만 베를리오즈는 이 오페라에 사용되었던 관현악곡들을 모아서 "로마의 사육제" 모음곡으로 편곡했는데, 이 작품은 굉장히 유명해져서 현재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오페라의 음악은 상당히 훌륭했지만 연출자와 가수들은 음악이 너무 낯설고 부르기 어렵다면서 작곡가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1837년에는 [[7월 혁명]]으로 집권한 프랑스의 [[7월 왕정]]으로부터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진혼곡(requiem)을 의뢰받아서 같은 해에 초연했으며 1839년에는 자신의 세 번째 교향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초연했다.[*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드라마틱 교향곡(symphonie dramatique)으로 명명했는데, 곡의 편성이나 구성을 보면 교향곡보다는 오라토리오에 더 가깝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베를리오즈 스스로 각 부에 악장(movement)대신 막(ac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이 작품은 4악장이 아니라 4막의 교향곡이다.] 1840년에는 역시 7월 왕정의 의뢰로 7월 혁명 10주년 기념식에 연주할 장송과 승리의 대 교향곡(Grande symphonie funèbre et triomphale)을 작곡했다. 이 교향곡은 기념식에 걸맞게 화려한 금관악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기념식 당시 200명이나 되는 연주자를 동원했음에도 연주자들이 자기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을 정도로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